2018년 5월 7일 월요일

화두공안(話頭公案) - 제20관


<한(恨)>

연작이 묻되
“장부(丈夫)의 한(恨)은 무엇이고, 용사(勇士)의 한은 무엇이며, 지사(志士)의 한은 무엇이오니까?” 하니
홍곡이 오래도록 묵묵(黙黙)한 연후(然後)에 긴 한숨을 토(吐)한 뒤 이르되
“지난날 어느 도인(道人)은 일체(一切)가 유심조(唯心造)라, 일체가 마음 아닌 것이 없고, 그 마음마저 공(空)하여, 일체를 놓아버리고 쉬어버리려던 그것마저 내려놓으니, 앉은 자리 눈앞이 그대로요,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부처 아님이 없으니, 그러므로 일상(日常)이 ‘부처를 안고 잠이 들고, 부처를 안고 깨어나며, 부처를 안고 날을 보낸다.’ 하였다.
미진(未盡)하고 통탄(痛嘆)스러운 인연이 있어 비록 탈속(脫俗)한 도인의 흉내는 내지 못하나, 옥중화(獄中花)를 가슴에 품고 잠자리에 들고, 옥중화를 안고 잠에서 깨어나, 옥중화를 품고 나날을 보내는 어느 백발용사(白髮勇士)들의 통한(痛恨)을 네가 아느냐!? 저승문턱을 넘을 때 무슨 면목으로 옛 선열들을 뵈오며, 부촉(咐囑)한 주군(主君)의 뜻을 무어라 아뢰겠느냐!?
용사의 통한은 청룡도(靑龍刀)에 사무치고, 장부의 혈한(血恨)은 짧게는 성상(星霜)을 붉게 물들이고, 길게는 광음(光陰)을 변색(變色)케 하며, 지사의 울울통분(鬱鬱痛憤)은 남몰래 길고 긴 시절(時節)을 물들이니라.
때가 되면 청룡도의 한기(恨氣)가 하늘에 사무치고, 성상의 혈분(血憤)이 천지를 물들이며, 시절통분이 하늘땅을 뒤바꿀 것이니, 이때를 일러 하늘땅에 그 누구도 제어하지 못하는 역사의 소용돌이요, 격랑(激浪)이라 하느니라.
비록 잊혀지고 묻어져 왔으나, 장강(長江)의 물밑은 늘 그렇게 흘러왔으니, 그것이 역사의 물줄기요 시절풍운(時節風雲)이라 하느니라. 이때를 당하여 주장자(拄杖子)들어 지공(指空)하며, 앙천대소(仰天大笑)하는 이가 과연 몇몇이겠느냐?!” 한다.

한참이나 긴 침묵 끝에 홍곡이 다시 이르되
“뼈를 에이는 영하 60도에서 땅을 파고 추위를 견디고, 심장이 익을 정도의 영상 50도가 넘는 열사(熱砂)를 그늘도 없이 견디며 해쳐 나아가고, 숨쉬기조차 버거운 해발고도 5천, 6천 미터를 이를 악물고 오르내리면서도, 오직 한마디 ‘민족의 만년대계(萬年大計)와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국가의 명운(命運)이 임자들의 어깨에 달렸다.’는 그 한마디에, 목숨을 걸었던 수많은 용사들의 자부심과, 오늘 눈앞의 이 참람한 한(恨)을 그 누가 아는가!?
백발노구(白髮老軀)에 몸은 늙어 우수(迂叟)가 되었으나, 일구월심(日久月深) 무엇을 위하여 욕됨을 참으며 인고(忍苦)하는가!? 비록 우수의 몸이나 무엇을 기다리고, 무엇을 위하여 마지막 장식함을 주저하는지를 그 누가 알겠는가!?” 한다.

홍곡이 전에 없이 격앙(激昻)하여 연이어 이르되
“어찌 우수를 의지한 백발노구(白髮老軀)라 여겨, 유유장강(悠悠長江)의 소리 없는 흐름을 홍로상일점설(紅爐上一點雪)이라 비웃는가!? 혈기방장(血氣方壯)하여 기치(旗幟)를 세운다고 천지가 개벽(開闢)하더냐!? 그것은 역리(逆理)이지 순리(順理)가 아니지 않더냐!? 하룻밤 적막(寂寞)함이 지나고 나서 문을 열면, 어느새 만산편야(滿山遍野)가 백설(白雪)로 뒤덮여 있느니라.
이와 같이 천지개벽은 순리이지 역리가 아니니라. 역순(逆順)과 순역(順逆)이 그러할진대, 연작(燕雀)이 홍곡지지(鴻鵠之志)를 알지 못함이 이와 같으니라. 명리탐욕(名利貪慾)을 앞세운 간계(奸計)와 무모(無謀)함이 어찌 연륜(年輪)의 어진 뜻을 감당하겠느냐!?
입으로 토(吐)하는 핏덩어리야 약으로 멈춘다 하지만, 가슴으로 흘리는 이 피는, 가슴으로 옥중화(獄中花)를 키우는 한 어느 때에 멈추겠느냐!? 비록 일평생을 필부(匹夫)라 이름하였으나, 이제 장부의 건곤일척(乾坤一擲)이 눈앞이라, 수미산(須彌山)이 엎어지고 우주가 두 동강이가 나도 아무 일이 없다 하였으니, 어디를 향해 삼배(三拜)를 올리고 허물을 구하겠는가!
영원무궁(永遠無窮)토록 피고 지니 무궁화(無窮花)요, 무궁화 영원토록 꽃피워 세상에 이익 됨이 끝없는 것이 아리수(阿利水)이니, 아리수는 영원토록 마르지 않고 무궁화를 꽃피우니 영천(永川)이라 이름한다. 이 땅의 무궁화는 풍상(風霜)에 의연(毅然)한 옥중화의 마음꽃이요, 영원토록 옥중화(獄中花) 품어 가슴으로 꽃피우는 물은, 무궁한 아리수 영천이라 이름하느니라!” 한다.

연작이 다시 묻되
“어찌 오랜 세월에 쌓인 한이 그뿐이겠습니까?” 하니
홍곡이 이르되
“장부의 한이란 사람 몸 받아 태어나 보국위민(保國爲民)하고, 세상을 바로잡을 뜻을 바로 세워 그 뜻을 다하지 못함을 한이라 할 뿐이니, 나머지는 탐욕(貪慾)을 채우지 못한 어리석은 무리들의 분노(忿怒)이니라. 모두가 욕심을 다하지 못함을 한이라 하여 한풀이로 세상을 난장판으로 만드니, 지금 눈앞이 그러하니라. 필경에는 탐욕을 채우지 못한 그 분노의 불길이 불러올 재앙(災殃)이 세상을 결단내리니, 그를 두고 한쪽에서는 진심(嗔心)의 과보라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불의 심판이라 하느니라.” 한다.

한줄기 참 빛을 의지하여 전변(轉變)함은 뜻이 그러하니
황벽(黃蘗)이 나무를 심는 뜻은 후세에 표훈(表訓)을 삼고자 함이나
옛사람이 이르기를
“숲은 불태우더라도 나무는 베지 말라.” 하네.

<작성 - 2018년 5월 7일(음력 3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