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떠 우러르니 면목(面目)이 없고,
굽어 살피니 염치(廉恥)가 없으니,
무엇이 이 한 사람의 본래면목인가!?
망망(妄妄)하고 몽몽(夢夢)한 치망(癡網)의 풍상(風霜)이 다 가니,
참으로 부끄럽고 부끄럽기가 그지없는 발분(發奮)의 광음(光陰)이였고,
그 그늘 지나고 나니,
또한 미안하고 민망(憫惘)하기가 그지없는 우순(憂憌)의 세월(歲月)이더니,
어느덧 눈앞에 슬며시 염치없는 시절(時節)이다.
부질없이 눈앞을 돌이켜 옛일을 추회(追懷)하노니,
납의(衲衣: 糞掃衣분소의)에 몸 맡기고 눈 푸르던 벗들이여!
미안하고 부끄러움이 시대를 저버리니,
식언망어(食言妄語) 허언기어(虛言欺語)가 예사로운 시절이나,
심지어(甚至於) 칠년대한(七年大旱) 큰 가뭄에도
무심초(無心草) 나눠 물고 맺은 논두렁 약속으로
삼남(三南)에 풍년이 든다 하였으니,
혜명(慧命)을 높이 받들어 조사당(祖師堂)에 올린 약속,
대장부(大丈夫) 발심초서(發心初誓)를 어이 가벼이 하려는가!
옛일이 이러하고 지금일이 이러하니,
조조상승(祖祖相承) 면면(綿綿)히 이어온 가풍이 지극하고 지엄하여
취모검(吹毛劍) 절영도(絶影刀)에 목을 맡기고
역대에 흘린 땀이 조계(曹溪)를 이루었으니,
망향정(望鄕亭)의 통절(痛切)한 회한(悔恨)을 몇몇이나 헤아렸으며,
망월루(望月樓)의 사무쳐 넘치는 누하(淚河)를 몇몇이나 짐작하였으며,
간월대(看月臺)의 소슬(蕭瑟)한 풍취(風趣)를 몇몇이나 맛보았으며,
관풍루(觀風樓)의 외로운 탄식(歎息)을 몇몇이나 거두어갔으리요!?
업인연분(業因緣分)이 이러하고 시세(時世)가 적막하여
외롭고 쓸쓸한 우수(迂叟)의 몸을 기대어,
한때의 아쉬운 자분(自分)을 내려놓고 공산에 홀로 섰으니,
어디를 향하여 삼배를 올리고 은혜를 물어야 하는가?!
이제,
고이접어 갈무리한 한뜻마저 아득하니,
객향(客鄕)의 추월(秋月) 소슬바람에 부질없는 백발이 하도 서러워,
앙천(仰天)하여 통곡(慟哭)하고 눈 한번 흘기니,
문득,
둥근머리 옛 할아버지 반야봉(般若峯)에 서서
주장자(拄杖子)들어 지공(指空)하며 파안대소(破顔大笑)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