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24일 금요일

제1장 춘몽예어 - 8. 간화대의와 화두공안 (p.314-316)


- p.314-316 가운데 일부 발췌 -

화두 없이 문득 ‘홀기무명 하여 생사 업이 생겨난 본원에 대한 본제공안(本際公案) 근본의정(根本疑情)’을 일깨워 의지하면 조사선이고, 화두를 빌어 공안의정을 일으켜 의지하면 간화선이다. 그리고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여(the luminous transparency of the void and serenity, 空함에 빠지고 고요함에만 머물러 침공체적沈空滯寂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깨어있어 적멸寂滅 가운데 비춤과 활용活用의 현기대용玄機大用이 활발발活潑潑하여) 해결해야할 공안에 대한 의정이 의식적인 사량분별을 여읜 성전일구(聲前一句, the ultimate truth before the utterance, a phrase before the utterance of a sound)를 의지하면 겁외(劫外, Outside of the time streaming)에서 소요시절(逍遙時節)하는 격외(格外, Outside of the normal convention in the search for truth)의 활구참선(活句參禪, Meditation practice by a living phrase)이며, 화두공안이 말로서 말을 드러내는 명제(命題)가 되어 의식적 분별사량으로 헤아리는 의심에 머물면, 이는 꿈속에서 장한몽(長恨夢)을 꾸는 사구명상(死句暝想)이다.

그런 연유로, 화두에 의하여 제시된 공안을 의지하여서도 의정을 일으키지 못하고, 분별하는 의심에만 의지하면, 수행의 과정이 화두를 굴리는 것이 아니라, 화두에 매달리는 것이 되어, 이마 위의 일구(一句)는 사구(死句, dead phrase)가 되고, 일평생을 애쓴 수고로움이 의식체계를 떠나지 못한 꿈속의 장엄(夢中莊嚴, Setting forth majestic ornamentation in sleep)으로, 그 궁극은 유념지(留念地)의 명상해오(瞑想解悟)이고, 제불정토(諸佛淨土)인 실지정토(實地淨土)는 꿈속에서도 보지 못한 채, 돌아가 얻는 바는 한 낱, 구하여 성취한 업력(業力)가운데의 환주장엄(幻住莊嚴)이며, 스스로 말법의 시대를 벗어나지 못하여, 삼시(三時佛法, The different periods of Buddha’s-teaching)가 시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절에 있는 줄을 모르고, “말법에는 증과가 없다.”함을 드러내 보이는 허물을 짓게 되는 것이다.

즉 화두공안에 곧바로 의정이 즉발(卽發)하여, 염념(念念) 가운데 의정이 뚜렷함이 간화결의(看話決疑)의 출발이며, 염념의 흐름이 멈추어, 한결같은 의정이 초념의 일념에 상응(相應)하여 항상(恒常)함이 간화의의(看話疑義)가 무르익는 시절이고, 마침내 상응하는 일념마저 있음을 여의어 문을 열고 뜰을 나서는 것이 간화대의(看話大義)를 이루어 마침이다. 그러므로 상사지속(想思持續)하는 가운데 분별의상(分別疑相)이 뚜렷하여, 이치(理致)가 명료(明瞭)하고 명료하면 분명한 사구명상이다.

쉬어가고 쉬어가는 가운데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에 곧바로 즉하여 명료(明了)하거나, 조사서래의가 의아함이 한결같아 분별상사이전(分別想思以前) 즉초원념(卽初元念) 무간의정(無間疑情)으로 참구(參究)하다가 문득 즉하면 조사선류(祖師禪流)요, 의지함이 지나쳐 내려놓고 쉬어가지 못하여 무간의정이 일어나지 않아, 분별의심(分別疑心)으로 조사서래의가 궁금하여 물으니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이니라.” 하고 답한다. 여기서 문득 정전백수자가 의아하여 즉초원념에 상즉(常卽)하여 참구하면 간화선류(看話禪流)이며, 의아함이 차별의심 분차사량(分差思量)으로 돌아서면 사구명상으로 흘러간다. 즉 조사서래의에 까닭 없이 일어나는 무간의정이 바로 상즉함과 조사서래의를 의지하여 정전백수자에 대한 상즉의정(常卽疑情)을 불러일으켜 즉함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조사서래의를 묻는 눈앞의 이것이 다르지 않고, 정전백수자라 되묻는 눈앞의 이것이 다르지 않으니, 본래 다르지 않는 것이 돌아와 부딪쳐 하나로 돌아가며 큰 섬광(閃光)을 일으켜 드러내니, 일시에 삼계(三界)를 밝히고도 부족함이 없다.

화두가 화두인줄 알면 화두공안은 간곳이 없어지고 분별명제(分別命題)만 남는다. 그러므로 화두 하나 내려달라 간청할 일이 아니라, 눈앞의 한 일에서 무엇을 물을 것인가를 살펴내어 선지식(善知識)을 닦달해서, 마침내 붉은 핏덩이를 토하게 하여 그 핏덩이를 선채로 온몸으로 뒤집어쓰고, 그 선 자리에서 결판을 내야 한다.

더러는 무연지연(無緣之緣) 가운데, 진여정념(眞如正念)의 동상(動相)없는 즉초원념(卽初元念) 무분별지(無分別地)에 까닭 없이 일어나는 알 수 없는 궁금함으로 무공용(無功用)을 얻어, 당금당처(當今當處) 눈앞을 놓치지 않으니, 참으로 ‘본래의 성품인 반야의 지혜’를 드러내어 응연히 활용할 줄 아는 대근기(大根機)라 할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