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335-336 가운데 일부 발췌 -
섣달그믐 긴긴밤 큰 어두움이 지나야 비로소 정월초하루 정단(正旦) 해가 밝게 뜨는 법이니, 항상 “무심(無心)이 도(道)이다.” 하기도 하고, “무심도 도가 아니다.“라는 옛사람(菩提達磨)의 말이 공연한 희론(戱論)이 아닌 줄 알아야 한다.
해가 바뀌면 이미 옛사람 초립동이(草笠童伊)가 아니니, 정단해가 밝기 전 섣달 그믐밤에는 어른들을 찾아가 뵈옵고 묵은세배를 드려야 하는 법이다.
모름지기 실참행자(實參行者)라면, 앞생각이 끊어지고 뒷생각이 일어나지 않아, 휴휴거각(休休擧覺)에 일념만년이라, 앞뒤 경계가 단절하여 오롯이 비추는 바탕만이 홀로서서, 물아능소(物我能所)가 일여(一如)하여 깊고 깊은 심원(心源)에 도달하여서, 일체공용(一切功用) 분별대대(分別對對)가 불요(不要)하더라도, 이는 본래 마음 청정본원을 가리어 본원진제(本元眞際) 신통광명을 드러나지 못하게 하는 대사(大死)의 경계일 뿐이니, 크게 죽어 아득히 깊은 곳 진정대승묘(眞定大勝妙)의 그믐밤에는 반드시, 실지정견(實智正見) 정전안목(正傳眼目)의 선지식을 찾아서 삼배의 예를 갖추어 묵은세배를 올리고, 절값을 받아내어, 불조께서 일대사인연으로 베푸신 큰 은혜에 보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이하랴!
서슬 퍼런 일휘(一揮) 취모검(吹毛劍)에 목을 맡기고자,
만리험로(萬里險路)의 수고를 아끼지 않던 옛길은 끊어져 들풀 무성하고,
문후아손(問候兒孫)들과 참문납자(參問衲子)들을 흔연히 맞아들여,
살림살이가 가난하여
절값이라고 내어놓을 만한 것이 없다 하시면서도,
더러는 가만히 노자(路資)를 내어주시고,
더러는 세뱃돈을 후하게 쥐어주시던 옛 어른들의 향취(香臭) 아득하니,
고금당(古今堂) 뜰에는 춘설화(春雪花)가 분분(紛紛)하건만,
쓸쓸한 무설전(無說殿)에는
옛사람의 현의현지(玄義玄旨)를 담아내던 주장자(拄杖子) 홀로 외로우니,
몸담은 시대가 적막(寂寞)하고 소슬(蕭瑟)하여,
지어가는 시절이 참람(僭濫)하고 민망(憫惘)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