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8일 금요일

제1장 춘몽예어 - 4. 참선(參禪)과 명상(瞑想, 冥想) (p.245-246)


- p.245-246 가운데 일부 발췌 -

활구참선이 있음(有念)을 여의고, 무간(無間)의 의정으로 의식체계에 의한 모든 생명현상의 오류를 바로잡고, 의식적 작용을 의지함을 떠나, 생명의 본원으로 돌아가게 하는데 비해서, 명상의 궁극적인 효과는 명상수행이 수행자가 자각하지 못하는 근본유념지(根本有念地)의 자아적인 존재지각처(存在知覺處)인 공소(空所)를 의지하므로, 생명체의 표현형에너지변경에 의한 의식체계의 작용과 발현능력 변화로, 의식체계를 의지한 경계에 대한 감촉(感觸)의 요별(了別)인 촉식작용(觸識作用)과, 인지(認知) 인수(認受) 인식(認識)의 의별(意別)인 의식작용(意識作用)과, 자아적 사량(自我的 思量)의 분별작용(分別作用)인 자아의식작용(自我意識作用)과, 근본함장식(根本含藏識)의 무의식적 반응 등에서 ‘생명현상의 의식체계적인 도약(跳躍)’을 가져오는데 그친다. 그러므로 의심즉차(擬心卽差)이라, 수행의 방법이 잘못되어 의식적 유념(意識的 流念)을 의지하고, 한 마음 분별생각으로 헤아리려 하면 곧바로 어긋난다.

더러는 수행에서 ‘의식의 집중과 호흡법이 가미된 운기행공(運氣行功)으로 지어진 의단(意團)과 기단(氣團)’을 ‘의지한 바 없는 활의정진(活疑精進)으로 지어진 의단(疑團)’으로 착각한다. 도가의 수행이나 다른 명상수행은 호흡기세(呼吸氣勢)나 착상상관(着相常觀)으로 지어진 기단과 명상가경(明相假境)을 소중히 여기고, 지어진 바를 의지하여 현상적 생명성이라 착각하는 가경호상(假境好相)을 더욱 증가 시키려하지만, 활구참선에서는 활의정진으로 지어진 의단을 의지한 바 없이 의지하여, 의지한 바 없이 의지한 상즉의단(常卽疑團) 본원(本源)을 타파하며, 의단(意團)과 기단(氣團)은 몸을 의지하고 있음을 의지하지만, 의단(疑團)은 일체의 의지한 바가 없이 다만 그대로 무공소(無空所)의 깨어있는 눈앞이다.

그리고 수행에서 닦는다 하고, 녹여낸다 하고, 타파한다 하니, 닦을 무엇이 있고, 녹여낼 무엇이 있고, 타파할 무엇이 있는 줄 착각한다. 다만 자취 없이 밟아온 길이 그러하니 자취 없이 돌아가는 길이 그러할 뿐이고, 지은 바 없이 지음이 그러하니 거둔 바 없이 거둠이 그러할 뿐, 문득 앉은자리 중생의 참모습을 보니 일체제불(一切諸佛)이 자취를 감출뿐이다.

억겁(億劫)을 길에 나와 있었으나 한 번도 고향을 떠난 일이 없고, 잠시도 고향을 떠난 일이 없었으나 늘 길 위에 있었으니, 스스로 건립하여 스스로 지은 바를 스스로 거두고 스스로 되돌릴 뿐, 그 누구도 대신하여 줄 수도 없는 일이다.

가아를 의지하여 수행하면, 닦여진 나라고 여겨지는 새로운 가아에 의하여 생각의 파장을 두루 알아서 남의 생각이나 읽으면서, 그것을 바람이 일기 전에 기미(機微)를 먼저 알아차리는 일과 혼동하고, 생각을 떠나서 마음 마음으로 모든 생령(生靈)들의 고된 바를 비추는 일로 잘못 알아 거기에 안주하니, 가히 마른 대나무 가지나 흔드는 용한 무당이라고 할만은 하나, 이는 참선도류(參禪道流)의 본분과는 크게 벗어난 일이니,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아 빌미를 주지 않는 이를 마주하여 등줄기에 흐르는 땀을 어찌할 것인가! 지난날 양무제(梁武帝)가 총우(寵遇)하던 무신(巫臣)이 달마대사 앞에서 서늘한 땀을 흘린 일도 이와 같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