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18일 월요일

제1장 춘몽예어 - 8. 간화대의(看話大義)와 화두공안(話頭公案) (p.307-308)


- p.307-308 가운데 일부 발췌 -

더러는 평생을 화두를 머리에 이고서 화두에 매달려 허송세월(虛送歲月)하고, 더러는 여러 화두를 타파하였다는 이력(履歷)을 내세우지만, 화두는 타파할 대상이 아니라, 공안을 제시하여 제시된 공안에 즉하여서 의정을 일으키고, 그 즉발의정을 의지하여 진로(塵勞)를 단멸(斷滅)하고 묵묵히 묵은 업을 녹여내어, 공안의지 공안낙처(公案落處)를 명료(明了)하여 본래면목을 드러내도록 이끌어주기 위한 방편도구이며, 저 조사의(祖師意) 깊은 곳, 골수(骨髓)를 아프게 찌르는 송곳이다.

팔만사천법문이 모두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이듯이, 일천칠백의 모든 공안의지(公案意指, The pointing of the Gong-an, or technical term of Seon Buddhism)는 문 없는 문을 지향(指向)하고, 발처즉낙처(發處卽落處)인 자자공안(自自公案)의 등 뒤를 가리킨다.

여러 화두를 타파하였다는 것은 옛사람의 언구(言句)를 깨달아 지극한 이치를 의지하여 이해하고, 의미를 알아차렸을 뿐이지, 화두공안에서 발로한 의정을 의지하여 눈앞의 은산철벽 같은 무명장을 타파하여 화두공안의 참소식인 진여자성을 증득하고, 본원의 적멸(寂滅)에 계합하였음이 아니다.

흔히들 더러는 화두공안을 타파하였다면서, 여러 화두공안을 점검하여 일체화두에 막힘이 없다고 자랑하기도 하고, 더러는 어느 화두에 막혀 또다시 수년을 참구하였다 하는데, 이는 화두공안의 공안의지를 잘못 알아, 단지 화두를 의식적 분별사량의 명제(命題)로 삼아 성취한 명상수행의 의식적 정화(淨化)나, 철학적 사고(哲學的 思考)로 성취한 의식적 도약(跳躍)에 의하여, 이해가 지극해진 알음알이로 심량(深量)하였을 뿐이지, 스스로가 깨쳐 자각하고 증험하여 본원에 계합하지 못하였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방편교설(方便敎說)도 방편이고, 궁극을 가리키는 요의교설(了義敎說)도 부득이한 방편이니, 불조의 팔만사천법문이 모두가 방편이고, 역대조사의 일천칠백 화두공안이 모두 저편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요 부득이한 방편이다. 그러므로 화두를 명제로 삼아 분별의심하면서 이 화두 저 화두를 깨친다 하니, 어찌 손가락을 부여잡고 손가락을 깨친다 하겠는가? 이는 가히 연작(燕雀)이 홍곡지지(鴻鵠之志)를 아득히 알지 못함과 같다.(*말없는 도를 말을 빌어서 드러낸다 하나, 불가설 불가설전不可說 不可說傳이니, 그 말을 빌어서 드러낸 역대의 방편문方便文을 문자 그대로 따라가면, 귀결처는 이해하여 깨달아 얻은 해오일 뿐이다.)

화두공안의 타파는 궁극의 증과(證果)가 있어야 하며, 증과의 성취는 한번이면 그뿐, 진여자성을 깨쳐 계합한 궁극의 본원에서 또다시 무엇 때문에 깨칠 도구가 필요하겠는가?

남문(南門)을 깨트려 공성(攻城)에 성공한 장수(將帥)가 어찌, 다시 성을 나와 북문(北門)과 동서문(東西門)을 차례로 공략(攻略)한다 하겠는가? 그러므로 증과 없는 깨침은 궁극의 깨침이 아니며, 증험하여 증오하고 얻은 바 없이 증득하여 상적상조(常寂常照)하는 자성청정대적멸(自性淸淨大寂滅)의 자리가 아니면 절대 일을 다 해서 마침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