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계(三界)를 벗어나 어디로 가려는가?!!>
삼삼오오 모여서 연탄불을 피우고, 자식 손잡고 강물에 뛰어들고,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고, 나뭇가지에 목을 매고, 아파트 창문에서 뛰어내리며, 참으로 맥없이 쓰러진다. 자신이 없어서 그러는가? 귀찮아서 그러는가? 부끄럽고 미안하고 민망해서 그러는가? 외롭고 쓸쓸해서 그러는가? 허무하고 허망해서 그러는가? 피하고 싶은 두려움이 있어서 그러는가? 모두가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는 말을 들어나 보고 그러는가? 어찌하여 사람 몸으로 태어나 부모자식이라는 이름을 얻고, 형제남매라는 이름들을 얻어놓고, 이름값을 못하고 도망치려 하는가? 이름값도 못하고서 피하려고만 하니, 치졸(稚拙)하지 않는가!? 여의도 어느 곳에서는 너 죽고 내살자며, 사시사철 물고 뜯고 빠득빠득 하는데, 그렇게 살 바엔 차라리 그편이 낫다는 것인가?
어느 선지식(善知識)이 좌선(坐禪)하는 수행자를 보고 “무엇을 하는가?” 하고 물으니, 그 수행자가 “도(道)를 닦고 있습니다.” 하자, 선지식이 다시 묻기를 “도를 닦아서 무얼 하려 하는가?” 하니, 수행자가 다시 답하기를 “도를 이루어 삼계(三界)를 벗어나고자 합니다.” 한다. 그러자 선지식이 말하기를 “그러면 그대는 삼계를 벗어나 어디로 가려하는가?” 한다. 삼계가 마음이요, 만법이 식(識)이라 하였으며, 일체법(一切法)이 마음법이고, 마음 마음이 공(空)하니, 당연히 본무생사(本無生死)가 아니던가?
유무법상(有無法相)이 일체대대(一切對對)이니, 오고 감이 한 쌍이라, 옴이 서니 절로 감이 선다. 본무생사이니 본래 오고감이 없건마는, 온 바도 없이 왔다고 믿으니 가는 곳이 생기고, 그 가는 곳을 모르니 혼자서는 두렵고, 외롭고, 서러워, 일면식도 없는 이들이 모여 연탄불 피워놓고 생을 마감하고, 공연히 허망하고, 홀연히 지은 바가 두렵고 무서우니, 앉은 자리를 벗어나고, 지은 바를 벗어나려 별별 궁리를 다한다. 오갈 곳이 없는 곳을 두고 오고 간다 하니, 모두가 가면은 어딜 가고, 간다고 아주 가며, 가면은 다시 와야하는 것인데, 무엇이 서럽고,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미심쩍어 안도(安堵)하지 못하는가? 올가을 단풍은 유난히도 좋다는데, 지금가면 이 가을 단풍은 어찌하려는가?!
원효대사가 법문하기를 “막생야 사야고, 막사야 생야고 莫生也 死也苦, 莫死也 生也苦(나지마라! 죽는 것이 괴로움이요, 죽지마라! 나는 것이 괴로움이다.)”라 한 뒤, “내 법문이 짧고 좋지 않느냐?” 하니, 시동(侍童)인 여덟 살짜리 사복이 말하기를 “무슨 법문을 그렇게 너절하게 길게 하십니까?” 하며, 한마디로 “생사고 生死苦(나고 죽는 것이 모두 괴로움이다.)”라 한다. 이렇듯 명백하게 생사는 괴로움인데, 본래 없다는 생사가 어찌해서 눈앞에서 분명한가? 무엇 때문에 밝히려 하지는 않고, 벗어나도 벗어난 자리가 그 자리인 줄 모르고, 모두가 헛되이 벗어나려고만 애쓰는가!? 설사 오고감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사람 몸 의지하였으면 할 일은 하고 가야하지 않겠는가!?
벗들이여! 삼계는 마음이요, 눈앞의 만상일체(萬相一切) 만법경계(萬法境界) 종종제상(種種諸相)은 다만 식(識)이라 하였으니, 삼계가 한 뙤기 마음 밭이요, 대천(三千大千)이 한손아귀인 것을, 어찌하여 자승자박(自繩自縛)하고서 벗어나려 몸부림치고, 마음밭 한자락에서 피고 지는 삼계를 벗어난다 하며, 부질없음을 일삼는단 말인가!? 우리 모두 스스로 일으키고 스스로 얽어매었으니, 모두가 스스로 내려놓고 스스로 쉬어버려, 앉은 자리에서 삼안(三眼)을 밝게 뜨면, 현전목전(現前目前) 당금당처(當今當處) 눈앞이 그대로 만목청산(滿目靑山)이요, 본각정토(本覺淨土)가 아니겠는가!? 그러하니 사는 대로 그저 한번 살아보는 것이 어떤가? 모두가 이 가을 단풍구경이나 하는 것이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