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장. 후기> 가운데 일부 발췌 -
“계(界, system)는 우리들의 묵시적(黙示的)인 개념적 합의로 성립된 관념이고, 법칙은 관념적 계(觀念的 界)의 질서(秩序, order)이며, 이론은 법칙의 관념적 논리(觀念的 論理, ideal logic)이다.”
우리는 관념의 틀에 묶이면 사방이 벽이고, 관념을 깨트리면 사방이 문인 것을 알면서도, 관념에 사로잡히면 사방이 벽이고 관념의 틀을 벗어나면 사방이 문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줄은 쉽게 자각(自覺, Self-awareness)하지 못한다.
이론과 법칙은 진리의 궁극을 향해가는 여정에서 우리가 지표(指標, indicator)로 삼아야 할 이정표일 뿐이다.
선구자(先驅者, pioneer)가 세워 놓은 이론과 관념적 법칙의 이정표에 묶여 나아가지 못한다면 진리의 궁극은 참으로 요원(遙遠)할 뿐이다.
우리가 수많은 이론과 수많은 법칙을 가지고 무엇을 고민(苦悶)하든 간에, 거울 속에서는 십년 전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고, 자연에서는 언제나 봄이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열매 맺고, 겨울에는 또 다시 봄을 준비한다.
찰나(刹那, An instant)를 쉬어가니 찰나가 만년이고, 만년이 찰나이며, 한 점을 거두어들이니 만유(萬有)가 한손아귀일 뿐, 찰나를 이어가니 만년은 길고 길며, 한 점을 쥐고 달리니 우주는 넓고 넓다.
발원지(發源地, source)를 알 수 없는 침묵의 강물은 도도(滔滔)히 흐르는데, 언제까지 강가에 서서 배 띄울 용기는 내지 못하고, 물결 높음만을 한탄(恨歎) 하겠는가!
불교의 경전(經典, scriptures)과 유가(儒家, Confucianism)의 경전과 도가(道家, Taoism)의 경전과 기독교의 바이블(Bible)이 그래도 읽을 만하기에, 세상은 다투어 제나라글로 번역하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 땅의 선배들이 후학(後學)들에게 외국학회지에 글 싣기만을 종용(慫慂)하지 않고, 일면식도 없는 노벨(Alfred Bernard Nobel, 1833~1896)이라는 사람 이름으로 주는 상(賞)받기를 독려(督勵)하지만 않고, 이 땅의 학도들이 세상이 다 읽기를 원하는 진실 되고 경이(驚異)로운 논문들을 쏟아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면, 무엇 때문에 언어 관념도 바르지 못한 이 땅의 어린 아우들을 영어(英語)의 나라로 내몰겠는가!?
지금 이 땅에 만연하고 있는 의도(意圖)된 시시비비(是是非非, right and wrong)와 같이, 학문의 역사이든, 종교의 역사이든, 또는 정치의 역사이든 간에, 정의롭지 못한 목적을 가진 이들의 이치를 벗어난 교언광설(巧言狂說)에 현혹되어, 교훈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귀중한 역사를, 한낱 시비의 대상으로 삼는 우(愚, foolishness)를 범하는 실수가 더 이상 없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며, 훗날 상아탑(象牙塔, ivory tower)의 맨 윗자리에 올라, 학계를 향해 우렁찬 사자후(獅子吼, The lion's roar, referring to the incomparable)를 토(吐)할, 어느 이름 모를 후배 용사(勇士, doughty hero)들의 영광(榮光, honor, glory)을 위한 초석(礎石, foundation stone)을 마련하고자, 오늘도 이 땅의 어느 척박(瘠薄)한 수수고토(愁愁苦土)에서 한 가닥 남은 희망의 불씨를 위하여 혼신을 다하며, 아직도 아무것도 드러낼 수 없는 일천(日淺)한 학문적 소양에 대한 민망(憫惘)함과, 분에 넘치는 자애와 정성으로 배려해 주시고 이끌어주신 분들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 송구(悚懼)한 마음을 안고, 이렇게 치기(稚氣)어린 초립동이(草笠童伊)같은 부끄러운 글로 외람(猥濫)되이 출판의 변(辯)을 대신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