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수풍운(洛水風雲)이 요요(擾擾)하니 몇 말씀 여쭙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은 누구입니까? 어디에서 왔습니까? 어찌해서 지금 여기에 있습니까? 왜 왔습니까? 무얼 하러 왔습니까? 온 뜻이 무엇입니까? 왔으면 온 소임(所任)을 다하고 있습니까? 각자 소임이 무엇인 줄 알고나 있습니까? 무엇은 해야 하고 무엇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까? 각자 앉은자리마다, 해야 할 맡은 바 소임이 있는 줄은 알고나 있습니까? 오고 가는 길은 모른다 하더라도, 온 뜻과 해야 할 소임도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요?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고,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무얼 하면서 살아왔고, 무엇을 하며 살고 있습니까?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사람 몸을 받아서 사람다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사람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사람 짓을 하고 있습니까? 사람답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람의 도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사람이 가야 할 순도(順道)를 지키며, 도리에 맞게 살고 있습니까? 혹시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잊고 사는 것이 없습니까?
생자(生者)는 필멸(必滅)인데 가야 할 때를 아십니까? 회자(會者)는 정리(定離)인데 가는 길이 다름을 아십니까? 때가 되면 어디로 가렵니까? 가는 곳을 아십니까? 짓는 대로 가야함을 아십니까? 오는 대로 오고 가는 대로 가는 것입니까? 어쩔 수 없이 오고 어쩔 수 없이 가는 것입니까? 어째서 능(能)히 오고 능히 가지를 못합니까? 모두가 스스로의 몫인 줄 아십니까? 자업자득(自業自得)과 인과응보(因果應報)쯤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알면서 왜 못할 짓을 합니까? 알면서 왜 길을 찾지 않습니까? 왜 눈을 감고 있습니까? 왜 눈을 떠 눈앞을 보지 않습니까?
사람 몸을 하고서 왜 사람 짓을 안 하는 것입니까? 사람 짓을 왜 못하는 것입니까? 강상(綱常)의 도리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지켜야 할 기본이 아닙니까? 나무도 나이테가 있는데, 가슴에 새기는 것도 없이 연륜(年輪)이라 합니까? 나이는 왜 먹습니까? 해가 바뀌니 저절로 나이가 먹어집니까? 나이를 먹었으면 나이값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한갓 수목(樹木)인 소나무도 스무살이 되면 송이(松栮)를 키워내지 않습니까? 왜 나이값을 안 하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나이값을 못하는 것입니까? 지혜(智慧)가 없으니 나이값을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왜 쓸데없는 탐욕(貪慾)으로 지혜를 가립니까? 탐욕으로 이룬 것을 어디에 가져가려 하십니까?
여러분들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성명(姓名) 말고, 앉은자리 이름들이 무엇입니까? 각자가 자리를 고를 때 마다, 분에 맞는 이름이 있지 않습니까? 왜 이름값을 안 합니까? 왜 이름값을 못합니까? 왜 이름에 맞는 도리와 처신(處身)을 못하고, 분에 맞는 제자리를 지키지 못합니까? 스스로의 자리와 스스로의 이름을 모르지는 않겠지요? 사람 몸으로 태어나 이름을 받았으면 이름값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름이 높고 거룩하면, 하는 짓도 높고 거룩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름에 맞는 자리를 얻었으면, 자리값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부모(父母)란 이름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왜 부모가 되어 부모의 자리를 지키지 못합니까? 왜 부모라는 이름값을 못합니까? 왜 지혜와 덕을 갖추어 자식을 돌보지 못합니까? 왜 부모로서 의연(毅然)히 제자리를 지키지 못합니까? 왜 현명(賢明)한 부모가 되지 못합니까? 왜 자애(慈愛)로운 부모가 되지 못합니까? 왜 자식을 바르게 이끌지 못합니까? 그러고도 자식들이 잘되고, 슬기롭게 성장하기를 바랍니까? 그러고도 노후(老後)가 편하기를 바랍니까? 그러고도 가는 길이 순탄(順坦)하기를 바랍니까?
자식(子息)이라는 이름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왜 자식이 되어 자식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부모를 공경(恭敬)하지 못합니까? 왜 부모님께 순종(順從)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합니까? 왜 부모님의 노후(老後)를 돌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입니까? 그러고도 자식들의 대우를 받고 싶습니까? 그러고도 부모님들이 편안하시기를 바랍니까? 풍수지감(風樹之感)을 아십니까? 풍수지탄(風樹之嘆)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모든 것은 때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부부(夫婦)라는 이름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왜 부부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부부가 서로의 자리를 지키지 못합니까? 왜 부부의 신의(信義)를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서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부부는 동고동락(同苦同樂)하는 일심동체(一心同體)가 아닙니까? 부창부수(夫唱婦隨)라는 말이 왜 세상에 나왔습니까? 그러고도 자식들이 잘 자라기를 바랍니까? 그러고도 가정이 화평(和平)하기를 바랍니까? 그러고도 자손(子孫)들이 잘되기를 바랍니까?
스승이라는 이름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왜 스승이 되어 스승의 자리를 지키지 못합니까? 스승의 도리를 다 하셨습니까? 스승의 길을 걸어 오셨습니까? 늘 스승의 자리에 계셨습니까? 은혜(恩惠)를 감사하는 제자가 있었습니까? 찾아오는 제자가 있습니까? 늘 안부(安否)를 묻는 제자가 있습니까? 감사하는 학부형이 있었습니까? 지금도 떠나간 제자들을 걱정하십니까? 그러고도 존경(尊敬)받기를 원하십니까?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무엇을 몸소 행하여 사표(師表)가 되셨습니까? 후회(後悔)되는 것은 없습니까?
제자(弟子)라는 이름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왜 제자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제자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스승의 은혜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스승께 감사해 본 적이 있습니까? 스승께서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시는지를 알고 있습니까? 스승을 찾아뵌 적이 있습니까? 스승의 안부를 묻고 지내십니까? 스승의 날에는 무얼 하십니까? 그러고도 스승을 뵈올 면목(面目)이 있습니까? 한번 떠나면 잊어버리는 것이 사제지간(師弟之間)입니까? 무엇을 배웠습니까? 스승의 가르침대로 살아왔습니까?
어른이라는 이름을 들어보고 그렇게 불리어 본 적이 있습니까? 왜 어른이 되어 어른의 자리를 지키지 못합니까? 아랫사람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젊은이들의 장래(將來)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다음세대를 생각하고 걱정해 본 적이 있습니까? 무엇을 남겨주고 가려 하십니까? 물려줄 무엇을 마련하였습니까? 금수(禽獸)의 땅을 물려주려 하십니까? 선대들께 물려받은 것이 무엇인지를 잊고 사셨습니까? 젊은이들에게 무슨 모범을 보였습니까? 그러고도 미안함이 없습니까? 그러고도 이 땅의 미래가 아름답고, 후손(後孫)들이 잘되기를 바랍니까?
젊은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왜 어른들 앞에서 젊은이의 자리를 못 지킵니까? 왜 젊은이답게 살지 못합니까? 왜 젊은이가 되어 정의를 외면하고, 나라를 생각하지 않습니까? 정의를 지키고, 나라를 위하는 것은 나이든 사람들의 몫입니까? 왜 젊은이답게 의지(意志)가 없습니까? 왜 젊은이답게 미래를 생각하지 않습니까? 왜 어른을 공경하지 못하고 받들지 못합니까? 왜 젊은이답게 슬기롭지 못하고, 바르지 못합니까? 젊은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젊은이의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합니까? 나라의 젊은이가 아닙니까? 사회(社會)의 젊은이가 아닙니까? 가정(家庭)의 젊은이가 아닙니까? 그러고도 죄송(罪悚)하지 않습니까?
형(兄)이라는 이름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왜 아우들 앞에서 형의 자리를 못 지키는 것입니까? 아우들에게 한번이라도 다정(多情)한 적이 있습니까? 아우들에게 아낌없이 양보해 본 적이 있습니까? 왜 아우들 앞에서 엄정(嚴正)하지 못하고, 모범(模範)이 되지 못합니까? 왜 아우들을 사려(思慮)깊게 보살피지 못합니까? 아우의 허물이 나의 허물인 줄 아십니까? 안행지로(雁行之路)는 그저 옛 말씀에 불과한 것입니까? 부모님의 바램이 무엇입니까? 끝까지 손잡고 같이 가며, 이끌어 주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뜻을 아십니까? 그러고도 부끄럽지 않습니까?
아우라는 이름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왜 형들 앞에서 아우의 자리를 못 지키는 것입니까? 왜 형을 받들고 따르지 않습니까? 왜 형을 부모님 다음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형의 어려울 때 성심을 다하여, 같이 어려워해 본 적이 있습니까? 형제사이는 천륜(天倫)이어야 하는 것을 아십니까? 그 천륜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 나무 한 가지에서 핀 꽃과 같은 줄 아십니까? 꽃이 다 지고 한 송이만 남았을 때 쓸쓸해 보이지 않았습니까? 형의 속마음은 언제나 다정(多情)한 줄 아십니까? 그러고도 아쉬움이 없습니까?
선배라는 이름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왜 후배들 앞에서 선배의 자리를 지키지 못합니까?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덕을 베풀고 모범을 보였습니까? 선배가 되어 오히려 후배들에게 누를 끼치지는 않았습니까? 선창후수(先唱後隨)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선배의 발자취가 후배들의 이정표(里程標)가 되는 줄 아십니까? 선배가 바로 이끌어야 후배가 바르게 따르지 않습니까? 후배들의 존경이 곧 선배의 위상(位相)인 줄 아십니까? 선배의 풍도(風度)와 위엄(威嚴)은 후배들의 신뢰(信賴)에서 나오는 줄 아십니까? 후배들을 위해 무엇을 베풀었습니까? 후배들을 위해 무엇을 양보(讓步)하고 희생(犧牲)했습니까? 그러고도 면목이 있습니까?
후배라는 이름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왜 선배들 앞에서 후배의 자리를 지키지 못합니까? 왜 선배를 신뢰하고 존경하지 못합니까? 선배가 못나서 입니까? 아니면 스스로의 오만(傲慢)입니까? 앞서가는 선배를 밀어주지는 못할망정 끌어내리지는 않았습니까? 꼭 선배와 마주보아야 그것이 선후배의 다정인 줄 아십니까? 때로는 앞서가는 선배의 의연한 뒷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선배의 전도(前途)를 빌어본 적이 있습니까? 선배를 존경해 본 적이 있습니까? 진심으로 선배자랑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고도 염치(廉恥)가 있습니까?
친구요 벗이라는 이름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벗이 무엇입니까? 그저 살아가는데 갖추어야 할 구색(具色)일 따름입니까? 벗의 가슴을 헤아려 본 적이 있습니까? 벗을 만날 때 미소(微笑)가 환한지 어색한지를 살핀 적이 있습니까? 벗의 얼굴에 묻어나는 언어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말없이 돌아가는 벗의 뒷모습을 보며, 무엇 때문에 찾아왔었는지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십년이고 이십년이고 소식조차 없는 벗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까? 벗을 위해 말없이 배려해 본 적이 있습니까? 살아오면서 진정으로 벗이라 부를 단 한사람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지도층(指導層)이요 지도자(指導者)라고 불리어 본 적이 있습니까? 왜 지도층이라는 이름으로 할 일을 안 합니까? 왜 지도자라는 이름으로 할 일을 안 합니까? 막중(莫重)한 이름으로 막중한 자리를 차지했으면, 그 해야 하는 일도 막중해야 하지 않습니까? 자리가 막중하고 이름이 막중하니 권위(權威)만 막중하고, 하는 일은 한없이 가볍고 편해서 좋습니까? 막중한 이름과 막중한 자리는 챙길 것만 막중하면 되는 것입니까? 일은 가벼이 하고, 챙긴 것만 막중하고도 와석종신(臥席終身)을 바랍니까? 그러고도 낯이 뜨겁지 않습니까?
정치가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본 적이 있습니까? 왜 정치가라는 이름으로 정치꾼의 행실만 합니까? 어째서 이전투구(泥田鬪狗) 권모술수(權謀術數) 후안무치(厚顔無恥)를 덕목(德目)으로 삼습니까? 대국민사기죄(對國民詐欺罪)와 유권자우롱죄(有權者愚弄罪)를 짓지 않고는 정치를 할 수가 없습니까? 흑색선전(黑色宣傳)과 호도(糊塗)와 유언비어(流言蜚語)와 날조(捏造)가 아니고, 진실한 모습으로는 국민 앞에 당당히 설 수가 없습니까? 그러고도 어째서 그렇게 당당합니까? 어째서 그렇게 뻔뻔합니까? 국민이 두렵지 않습니까? 유권자는 언제나 나의 사랑스러운 호구(虎口) 같습니까?
교육자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이 나라 교육을 위해서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교육시킨 이 나라 젊은이들이 지금, 정상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무엇을 가르치고 어떻게 만들어 놓았습니까? 나라를 압니까? 부모형제를 압니까? 스승을 압니까? 어른을 알고 위아래를 압니까? 지혜와 슬기는 어디로 빼돌리고, 어째서 영악(靈惡)함만 심어 놓았습니까? 그들은 가슴이 없고 머리뿐인 괴물(怪物)들이 아닙니까?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이 괴물들이 만들어 갈 이 나라의 미래는 어떨 것 갔습니까? 젊은 제가 다 한숨이 나옵니다. 그러고도 부끄럽고 미안하지 않습니까? 세사(世嗣)에 죄스럽지 않습니까?
가진 자들이라고 불리어 본 적이 있습니까? 있는 자들이라고 불리어 본 적이 있습니까? 왜 가진 자의 할 일을 다 하지 않습니까? 왜 있는 자의 도리를 다 하지 않습니까? 돈과 권력과 명예를 다 가지고도 무엇이 모자라, 더 가지려고 그렇게 모진 짓을 하는 것입니까? 무소불위(無所不爲)를 원하십니까? 그것은 인간세상에서는 이룰 수가 없어서 나온 말이 아닙니까? 만약에 무소불위를 성취하고, 세상을 다 가진다면, 그 다음은 어디에서 무엇을 더 얻으려 할 겁니까? 여러분의 성취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하였는지 아십니까? 여러분 앞에서 언제나 웃고 서 있는 검은 옷에 검은 갓을 쓴 이가 보입니까? 붉은 종이장을 받을 날이 언제인지 생각이나 하고 사십니까?
성직자(聖職者)라는 이름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 거룩한 이름으로 무엇을 하셨습니까? 세상을 바로 이끌고, 진리를 알리려고 최선을 다 하셨습니까? 혹시 거룩한 이름으로 더 거룩하신 이름들을 팔며, 혹세무민(惑世誣民)하며 살지는 않았습니까? 가사장삼(袈裟長衫)을 걸치고, 우아한 로브를 입고서, 신도(信徒)들과 신자(信者)들의 주머니를 축내는데 몰두하지는 않았겠지요? 왜 맡은 바 소임을 다하지 않습니까? 왜 진리의 길에 바로 있지 못합니까? 그러고도 참회(懺悔)하는 마음이 없습니까? 그러고도 세상이 평안(平安)하기를 바랍니까?
공직자(公職者)라는 이름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공직이 무엇입니까? 공직을 벼슬로 생각했습니까? 공직은 주인인 국민을 대신해서 나랏일을 해주는 국민의 심부름꾼이 아닙니까? 그래서 공복(公僕)이라 하지 않습니까? 왜 공복이 되어 주인행세를 하려고 합니까? 여러분들의 심부름 값을 주기 위하여 여러분들의 주인이 얼마나 많은 세금을 내는지 아십니까? 안정된 월급에, 연 600%의 공식적인 보너스에, 갖가지 수당에, 눈만 껌벅이고 앉아있어도 주는 성과급에, 퇴직금과 연금에, 무엇이 더 필요하십니까? 그러니 주인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고, 나랏돈이 내 돈 같으니, 내 돈을 주인을 위해 쓰고, 국민들을 위해 쓴다고 생각됩니까? 그러고도 이 나라가 잘 되를 바랍니까?
언론인(言論人)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까? 언론이 무엇입니까? 언론이 권력의 주구(走狗)입니까? 아니면 언론이 스스로 권력입니까? 누구로부터 무엇으로 얻은 권력입니까? 마음대로 하는 그 큰 권력을 가지고도 무슨 언론의 자유가 더 필요합니까? 쓰고 싶은 대로 쓰고, 지껄이고 싶은 대로 내뱉는 것이 언론의 자유입니까? 호도와 날조와 유언비어로 목적을 이루고, 혹세무민하는 것이 언론이 그토록 내세우는 창언정론(昌言正論)입니까? 하늘이 무섭지 않습니까? 세상이 무섭지 않습니까? 왜 지금 세상의 제1악이 언론이라 하는지 아십니까? 그 말에 아무 감흥(感興)이 없습니까? 간이 부어서 전혀 두려움을 모르겠습니까? 오늘 이렇게 묻는 뜻을 아시겠습니까?
조상을 아십니까? 조부모를 아십니까? 부모를 아십니까? 스승을 아십니까? 형제남매(兄弟男妹)를 아십니까? 선후배를 아십니까? 친구를 아십니까? 어른을 알고 세상의 위아래를 아십니까?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살아오면서 무엇을 배웠습니까? 자식들에게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후배들에게 무엇을 보여줬습니까? 아우들의 마음에 무엇을 남겼습니까?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베풀었습니까? 이 세대가 낳은 다음세대는 어떠하겠습니까? 또 그 다음세대는 어떠하겠습니까?
강상(綱常)의 도리는 단지 옛사람들의 유물(遺物)인 줄 아십니까? 사람모양을 한 짐승들의 세상이 안보입니까? 생각하면 미안하지 않습니까? 부끄럽지 않습니까? 안타깝지 않습니까? 슬프지 않습니까? 원통(寃痛)하지 않습니까? 후회스럽지 않습니까? 죄스럽지가 않습니까? 누구의 잘못입니까? 선대의 잘못을 후대가 감당(堪當)해야 하는 것입니까? 선대의 베풂을 후대들이 누리게 할 수는 없습니까? 선대는 후대를 위하여 사는 것이 도리가 아닙니까? 오탁계세(五濁季世)라 미리 말해놓은 뜻을 알겠습니까? 이 모든 것은 나의 허물이라면 믿겠습니까? 나와 여러분들이 함께 지은 일이라면 믿겠습니까?
이 모든 물음을 떠나, 단 한번이라도 사람이라는 이름을 생각해 보고, 국민이라는 이름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눈앞의 이 시절(時節)이 품고 있는 숱한 지난 세월(歲月)을 보십니까? 눈앞의 이 시절을 품고 흐를 숱한 먼 세월을 보십니까? 눈앞의 이 시절에서 지난 무엇을 보고, 다가올 무엇을 그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범부(凡夫)는 세월 따라 시대가 변하고, 시대 따라 시절이 변한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지자(智者)는 세월 따라 변하는 시대를 헤아려, 눈앞의 시절로 삼는다 하지 않았습니까? 모든 것을 눈앞에 두고 어찌해서 보지를 못합니까?
무엇이 두려워 정의롭지 못합니까? 무엇이 두려워 눈을 뜨고 보지 못합니까? 눈을 감고도 보는 놀라운 재주는 어디에서 얻었습니까? 눈을 뜨면, 눈감고 구하여 얻은 모든 것을 잃을까 두렵습니까? 눈을 감고 보는 것은 모든 것이 공화(空華)인 줄 왜 모르십니까? 어찌하여 눈을 뜨고 진실한 것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까? 도수(度數) 없는 유리안경을 끼고 보는 것도, 유리를 통해서 보는 것이 아닙니까? 하물며 십지만심(十地滿心) 법운지(法雲地)도 있다는 한 생각이 남았으니, 비록 이해는 부처와 같아도 보살중생(菩薩衆生)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어찌해서 여기에 와서, 요 모양 요 꼴이 되었는지, 궁금하지도 않고, 분하고 원통(寃痛)하지도 않습니까??? 오늘 이렇게 묻고 또 묻는 것은, 무엇 때문인 줄을 아시겠습니까? 무엇을 위한 명분을 찾고자 하는 줄 아십니까?
<작성 - 2017년 4월 3일(음력 3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