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하시차대사낙마진의(如何是車大使落馬眞意)오?>
연작이 묻되
“빅터가 대사내정(大使內定)이 확정된 일도 없다는데, 구태여 대사인준인 아그레망이 오고갔다며, 낙마(落馬)를 운운(云云)하는 것은 무슨 연유(緣由)이오니까?” 하니
홍곡이 이르되
“Nothing이면 저절로 Passing이니, 근본 없는 무리들이 체면을 세우기 위해 하는 넋두리를 어찌 일삼아 시비하느냐!?” 한다.
연작이 다시 묻되
“뭣 주고 뺨맞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번만큼은 못 참겠다 하고 무슨 조치(措置)를 취한다며, 들병이 논다니가 속곳 끈을 동여매고 치맛자락을 감싸 쥐더니, 사흘도 못가서 불한당 같은 강쇠가 앞자락에 포장을 치고 들이미니, 이번만은 조치를 예외로 하겠다며 속곳 끈을 풀고 치마를 걷어 올리니, 이것은 무슨 꼴불견의 작태(作態)이오니까?” 하니
홍곡이 이르되
“이리 차이고 저리 밟혀도 끽소리조차 못내는 것이 병신쪼다요 등신호구이니, 남북을 가릴 것 없이 물주(物主)와 바지와 주구(走狗)가 다함께 목숨이 경각(頃刻)에 달렸으나, 그 와중(渦中)에도 가오를 내세우고, 서열을 논하는 것이 가히 가관(可觀)이라 할 만하구나!” 한다.
연작이 또다시 묻되
“나라의 병기고(兵器庫)를 탈취(奪取)해서 일으킨 폭동(暴動)과, 평화를 가장(假裝)하여 반역(叛逆)과 찬역(簒逆)의 도구로 쓰인 촛불난동을 미화(美化)하여, 그 정신을 헌법전문에 새기고자 하는 무리들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도모(圖謀)하고자 하는 무리들입니까?” 하니
홍곡이 답하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방향의 의미도 없어지고, 선후차례(先後次例)의 의미도 없어지느니라!” 한다.
연작이 이어 묻되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라는 말도 있고, 재심(再審)이라는 말도 있는데, 일사부재리는 세상이 다 아는 일이나, 재심의 정의(正意)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재심으로 톡톡히 재미를 본다는 무리들이 늘어나는 것입니까?” 하니
홍곡이 답하되
“법이라는 것이 본래 시세(時世)를 떠나고 시세(時勢)를 엿보지 않아, 상정(常情)이 통하는 보편적인 정의(定意)를 덕목(德目)으로 삼아야 하나, 시세(時勢) 따라 시류(時流) 따라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 된지가 오래이니, 세월이 지나고 힘의 향배(向背)가 달라지면 잣대가 달라져, 서슬 푸르던 어제의 정의(正義)가 내일의 불법이 되기도 하니, 그를 기화(奇貨)로 재심으로 덕을 보고, 재미를 보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이더냐!? 같은 일을 같이 하고도, 누구는 빨갱이가 되어 평생을 어렵고 힘들게 살고, 어느 놈은 민주투사가 되어, 여의도에서 분에 넘치는 감투를 쓰고 호의호식(好衣好食) 하느니라!” 한다.
연작이 다시 묻되
“누구누구는 불알 밑까지 뒤져도 합법(合法)이고, 누구누구는 냄새나는 뒷구멍만 들여다봐도 불법(不法)인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홍곡이 이르되
“자고로 시세(時勢) 따라 인삼뿌리 먹는 놈과 무 뿌리 씹는 놈이 따로 있었으니, 아둔하니 무모(無謀)하고, 무모함이 가리는 것이 없어 버릇이 되니, 그를 일러 적폐(積弊)라 하느니라!” 한다.
연작이 또다시 묻되
“진압(鎭壓)은 발로 밟아 깔아뭉개는 것이고, 압박(壓迫)은 힘을 못 쓰게 은근히 눌러 조지는 것이온데, 이 말도 이렇게 쓰고, 저 말도 이렇게 쓰는 까닭은 무엇이오니까?” 하니
홍곡이 이르되
“듣는 것과 말하는 것이 다르고,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다른 것이 주구(走狗)의 으뜸 되는 덕목(德目)이니라!” 한다.
연작이 연이어 묻되
“입을 열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을 가슴에 품고도, 심산궁곡(深山窮谷)의 사찰(寺刹)에 유배(流配)도 가고, 그것도 모자라 영어(囹圄)의 몸이 되는 수모(受侮)를 겪고서도,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자 대범한 장부의 기개(氣槪)를 보이는데도 본체만체 하고, 누구는 전직(前職)이라 하여 연회(宴會)에 초대하니 이것은 또한 무슨 수작입니까?” 하니
홍곡이 이르되
“소를 잡기 전에 물을 먹이는 것은 악당들이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자 함이고, 목을 매달기 전에도 자장면 한 그릇 정도 먹이는 것은, 선악편당(善惡偏黨)을 떠나 뜻 없이 치르는 상례(常禮)이니라!” 한다.
연작이 옛일을 더듬어 묻되
“어느 시절에 뒷배 좋은 학동(學童)들은 데려다 볼모로 삼아 세뇌(洗腦)를 시키고, 불온(不穩)한 학동들과 될성부른 학동들은 가려서 싹을 자르기 위하여 감시하고자, 화합을 핑계 삼아 여러 학당(學堂)에 학동들을 주고받은 일이 있다는데, 그 결말이 어떠하였나이까?” 하니
홍곡이 이르되,
“물길은 돌려놓아도 잠시일 뿐, 물은 제 길로 흐르고 위아래를 거스르지 못하는 것이 철리(哲理)이니라! 오히려 데리고 와서 살피고, 가서 감시하다가, 풍도(風度)에 감화(感化)한 이가 적지 않았느니라!” 한다.
자!
낙처(落處)를 등 뒤에 두고 어디를 바라서 찾는가!? 살피지도 말고, 찾지도 말며, 문득 눈앞을 바로보라!!
<작성 - 2018년 2월 12일(음력 12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