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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1일 월요일

화두공안(話頭公案) - 제33관


<약무일체심(若無一切心) 삼계역비유(三界亦非有)>
 
연작이 묻되
“공들여 쌓아온 만년대계(萬年大計)가 어찌 될 것입니까?” 하니
홍곡이 무심한 듯 이르되
“삼세(三世)가 눈앞이요, 일체(一切)가 유심조(唯心造)이니, 무엇을 보았다 하고 무엇을 보지 못한다 하겠는가? 만약 일체의 마음이 없으면 생사는 어디에 있고, 삼계는 어디에 있겠는가!? 다만 이러하고 이러할 뿐이로다.” 한다.
 
연작이 아연(啞然)하여 망연부지(茫然不知)라, 가만히 소리죽여 탄식(歎息)하니, 홍곡이 문득 지공(指空)하며 앙천일성(仰天一聲)하고 당부(當付)한다.
 
행여 어느 뜻이 있어
저 멀리 요북(遼北)의 너른 들에
황금물결이 넘실댈 수만 있다면
억만년을 이어가는 서른셋 관문(關門)이 열리어
기약함이 있으련만
그 누가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어
용사(勇士)를 도와 대계(大計)를 도모(圖謀)하겠는가!!?
알아도 알 바가 아니요, 몰라도 알 바가 아니나
알 바가 아닌 것이 억겁(億劫)의 업(業)이로다!!!
끝없이 드넓은 대지(大地)에는 누런 물결이 넘실대고
그 위로 하늘 가득 벽운(碧雲)이 출렁이리니
그것이 여의주(如意珠)의 가을빛이요
여의주가 꾸며가는 찬연(燦然)한 빛이 일정명(一精明)이니
곧 선지(先知)하여 일컫는 입자생물학(粒子生物學)이요
입자생명학(粒子生命學)이니라.
텅텅 비어서 원만(圓滿)하니 공산(空山)이요
찬연하여 오히려 푸르니 벽운(碧雲)이라 할 뿐
그 가운데 때때로 주인 되어
크게 흥겨우니 공산주(空山主)요
때때로 나그네 되어
한가로이 소요(逍遙)하니 공산객(空山客)이로다!!!
그 하늘 그 대지에 누구를 일러 연작(燕雀)이라 하고
누구를 일러 홍곡(鴻鵠)이라 이름하겠는가!?
 
이제 보은(報恩)의 건곤일척(乾坤一擲)을 위해 물러나며
한 젊은이의 이름과 의지(意志)를 빌어
입자생물학의 대의(大義)를 내세워 중임(重任)을 맡기려 하니
강호제현(江湖諸賢)의 동도상응(同道相應)과
또한 엄중(嚴重)한 질타(叱咤)를 함께 고대(苦待)하는 바이다.
 
치문졸필(恥文拙筆) 화두공안 33관을 끝맺으면서, 낙수천변졸가말학(洛水川邊拙家末學) 공산벽운(空山碧雲)이 세세손손(世世孫孫) 후세영안(後世永安)을 위하여, 감히 강호(江湖)를 앙망(仰望)하여 고두백배(叩頭百拜)로서 그동안의 희언농사(戱言弄辭)를 사죄(謝罪)하며, 인연장중(因緣場中)의 세세(細細)한 나눔은 일일이 기약(期約)할 수가 없으니, 일찍이 아쉽고 처연(凄然)한 별리(別離)의 정(情)을 널리 표(表)해두는 바이다.
 
<작성 - 2018년 8월 6일(음력 6월 25일)>

화두공안(話頭公案) - 제32관


<무문관(無門關)>
 
연작이 묻되
“무엇이 무문관입니까?”
홍곡이 이르되
“묻는 이가 없어 스스로 설하니 무문자설(無問自說)이요, 법이란 본래 설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를 다만 이름하여 설법이라 한다(無法可說 是名說法). 눈멀고 귀먹은 채 물속에 앉았으니 일체가 벽(壁)이요, 눈앞을 바로비추니 일체가 문(門)이라, 어디에서 문을 찾고, 어디를 더듬어 문을 열겠는가? 궁극(窮極)의 본래자리를 요달(了達)하여, 본래 문 없음을 바로 비추고자 하는 것이 무문관이니라.” 한다.
 
봄바람은 무정하여 간월대(看月臺)도 비켜가고
망월루(望月樓)도 돌아가는데
달빛은 유정하여 자고새 밤새워 다정사(多情詞)를 부르누나.
어이하여
봄바람 지나간 자리 백화(百花)가 난만(爛漫)하고
다정한(多情恨)을 못 이겨 자고새 울고 간 옛길에
방초(芳草) 무성(茂盛)한가?
망향정(望鄕亭) 난간(欄干)에 서서
임 그리던 애틋함도 옛일이 되니
꽃 피고 새 우는 이 한 시절이 홀로 외로워라!
 
시세가 이러하니 시대가 이러하고
시대가 이러하니 시절이 이러하여
세운 뜻이 있으나 아는 이 없으니
이것이 장부의 쓸쓸한 고준(高峻)함이고
세운 뜻이 있으나 함께 할 이가 없으니
이것이 장부의 외로운 호기(浩氣)이고
세운 뜻이 있으나 전하고 펼칠 곳이 없으니
이것이 장부의 아쉬운 자분(自分)일 뿐
연연하고 저어함이 없다면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대장부 휘휘기상(輝輝氣像)이 모습에 있지 않으니
어찌 남녀에 있고 빈부귀천(貧富貴賤)에 있으리요!
뜻이 바르고 견고하여 주저하고 거침이 없으며
행하는 바가 그 뜻에 어긋나지 않으면 대장부이니
모름지기 대장부 뜻을 품었으면
조령삼관(鳥嶺三關)을 파(破)하지 않고
한양(漢陽)을 도모(圖謀)하겠는가!?
당부(當付)하고 당부하노니!
해당화(海棠花) 꽃피운 것은 봄바람일 뿐이니
행여 부질없이
관풍루(觀風樓) 난간에 기대어 서서
해당화를 의심하지 말고
선 자는 멈추지 않고 누운 자 잠들지 않아서
당금당처(當今當處) 현전목전(現前目前) 눈앞을 놓치지 않아서
찰라찰라(刹那刹那)에 방일(放逸)하지 않기를..
 
<작성 - 2018년 7월 30일(음력 6월 18일)>

화두공안(話頭公案) - 제31관


<시절가(時節歌)>
 
연작이 청(請)하되
“감히 시절가 한 곡조를 청하고자 하나이다.” 하니
홍곡이 웃으며
“네가 장단을 짚을 줄도 모르며 노래를 청하느냐?” 하며 노래하기를
 
“불성 없는 개에게 한쪽 눈을 보시하니
외눈박이 麻醯首羅는 눈을 감싸고 般若峯으로 달아나고
金色頭陀는 呵呵大笑 손사래 치며 大寂光殿으로 숨어든다.
春山萬花 함께 자지러지니 紅流洞 颼颼風光이 古今同이로다.
 
古今堂에 눈 푸른 오랑캐는 문 밖의 일을 모르고
宇我樓에 거문고 타는 이 曲調를 잊었는데
반야봉 천년 솔은 滿空碧雲을 이고 서서 古今을 재촉하니
西別院 오동나무 아래 코고는 늙은이 가만히 몸을 뒤척인다.
 
대적광전 莊嚴門을 열어 曼陀羅를 그려내어
伽倻山 雪寒風에 千江萬湖 細細히 梅花春情을 寄別하니
無明草 자른 둥근머리 노인은 一吹無孔簫로 逍遙靑山을 노래하고
般若草 기른 흰머리 노인은 江上에 배 띄우고 時節歌를 부르네.
 
光陰은 星霜을 이고 歲月을 지어가고
옛 사람은 옛 시절과 더불어 옛 길을 밟아가니
龍門亭 지붕 위에는 기와솔(瓦松)이 무성한데
흰머리 정자살이 옛 젊은이 홀로 난간에 기대어 졸고 있네.
 
그윽하고 외로운 姿態 창살을 두드리어
가만히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亭子에 달 비취고 바람 일어 春香이 芬芬한데
홀로 迎春舞 추는 이는 한 떨기 梅花로다.
 
외눈박이 늙은 行者 樂道에 뜻이 없어
외로운 학 구슬픈 울음 따라 鶴鳴樓에 홀로 오르니
萬古光明은 一如하고 靑山流水인데
濃春佳節 時節春色이 一代藏敎로다.” 한다.
 
자!
시절이 시절 아니니 어찌 하겠는가!?
노래는 처연(凄然)하고 곡조(曲調)는 구슬픈데
물색없이 장단을 짚고 어깨춤을 추니
어찌할 수 없는 난화지민(難化之民)이로다.
애달프고 애달파 탄식(歎息)하노니!
혜명(慧命)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만고(萬古)의 허물이요
천의준명(天意峻命)을 받들지 못하였으니
천추(千秋)의 한(恨)이로다.
외로이 장대(將臺)에 올라 동남풍(東南風)을 빌었으나
허물이 깊고 깊어 천색(天色)만 쓸쓸하고
난망지세(難望之歲)에 밀지(密旨)는 전할 길 없으니
서산낙조(西山落照)에 용마(龍馬)는 길게 우는구나.
 
<작성 - 2018년 7월 23일(음력 6월 11일)>

화두공안(話頭公案) - 제30관


<금의환향(錦衣還鄕)>
 
연작이 묻되
“무엇이 금의환향이옵니까?” 하니
홍곡이 이르되
“네 뜻이 가상(嘉尙)하다만은, 본래 고향을 떠난 적이 없는데 무엇으로 금의환향을 삼으려 하느냐? 까닭 없이 홀기무명(忽起無明)하여 생사의 강물에 맡기고 부침(浮沈)을 거듭하니, 까닭 모를 그 까닭을 알리고자, 옛 노인이 서쪽에서 왔느니라.
본래 있고 없음을 여의어, 공(空)한 일체(一切)를 있다고 고집하니 누구의 허물이더냐? 무명(無明)이 다하여 삼안(三眼: 慧眼, 法, 佛眼)이 밝으면, 생사마저 번뇌(煩惱)요 망상(妄想)이니, 그러므로 무명은 아비요 번뇌는 어미라 하느니라.
어릴 적 옛 스승은 고향을 떠나 부귀공명(富貴功名)하여 비단옷 입고 금의환향하라 하였고, 스무 살 젊은 나이에 기막힌 좌절을 맛보고, 해질녘에 고향을 찾아들어 뒷동산에 올라, 고향마을 저녁연기 바라보며 상념(想念)에 잠겼을 때, 일찍이 고향을 떠났다가 어느 날 소리 소문 없이 고향으로 돌아와, 일평생 고향 뒷산자락에 움막을 짓고 살며 기행(奇行)을 일삼았기에, 온 문중이 미친 사람이라 여겨 의심하던 옛 거사(居士)가 소리 없이 다가와 등을 두드리며, 고향을 떠나 두루 살펴 눈을 뜨고, 조상이 물려준 몸 상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옴이 금의환향이라 하였고, 그 길로 나서 옛 자취를 더듬어 찾아 뵌 현촉산(玄燭山) 백청노사(白靑老師)께서는, 대장부(大丈夫) 일신면모(一新面貌)를 드러내어, 큰 스승의 무연자비(無緣慈悲) 동체대비(同體大悲)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베푸신 은혜를 보답함이 금의환향이라 하였느니라.” 한다.
 
연작이 다시 묻기도 전에 홍곡이 이르되
“비록 비인부전(非人不傳)이라 부촉사(咐囑事) 전할 길 없어 품어 가려 하나, 너의 의중(意中)이 간곡(懇曲)하고 그러하니, 한마디 허물을 감당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본무생사(本無生死)에 금의환향이라는 것이 가당치도 않으나, 어리석고 어리석어 고향을 떠난 바도 없이 객로(客路)를 헤매이니 어찌 하겠느냐?
의지하면 생사요, 의지함을 여의면 생사 없는 본래자리이니, 내려놓고 쉬고 또 쉬어 쉴 곳마저 다하면 마침내 이룬다 하니, 무엇에 어떻게 의지하고 있는 줄을 몰라, 아득(阿得)하고 망연(茫然)하여 무엇을 어떻게 내려놓고, 무엇을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내려놓음은 억겁(億劫)을 짊어지고 다닌 보배덩어리를 내려놓음이요, 쉬어감은 부질없이 일으킨 염념(念念)의 흐름을 멈추고 업식반연(業識攀緣)을 쉬는 것이니, 내려놓고 쉬어가는 세세(細細)한 안배(按配)는 지어온 바가 다르고, 쌓아온 바가 사람마다 다르니, 일일이 열거(列擧)할 수는 없으나, 다만 의지하여 닦는다 하고 구하면 생사요, 의지함을 여의어 놓아버리고 쉬어버리면 본래 일 없는 자리이니라.” 한다.
 
무연자비 동체대비 일대사인연이라!
황금소 진창(泥濘이녕, 塗炭도탄)에 들어가니 자취 묘연하고
범음(梵音)은 원음(元音)이라!
가을바람 옥피리소리 곧바로 만겹 관문을 꿰뚫는다.
창공도 창공경계(蒼空境界)이고 허공도 허공경계(虛空境界)이니
승묘도 승묘경계(勝妙境界)이고 십지만심(十地滿心)도 눈뜬 당달이라.
금학일성(金鶴一聲)은 아득히 하늘밖에 사무치도다.
 
<작성 - 2018년 7월 16일(음력 6월 4일)>

화두공안(話頭公案) - 제29관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연작이 묻되
“무엇이 ‘이현령비현령’이옵니까?” 하니
홍곡이 가로되
“형(刑)이 확정되지 않은 피의자(被疑者)는 아직 죄수가 아니고, 죄수가 아닌 사람은 함부로 구금(拘禁)하고 구속(拘束)할 수가 없는 것이 당연한데도, 대법원의 판결은 고사하고, 일심재판도 시작하기도 전부터, 세상이 다 아는 사람을 도주(逃走)의 우려(憂慮)와 구속할 상당(相當)한 사유(事由)가 있다는 가당찮은 이유로 사람의 인신(人身)을 구속하고, 아직 인신확인도 되지 않은 사람을 포토라인에 세워놓고, 무슨 돈 받고 선 모델인 양 마음대로 사진을 찍어대고, 마치 초청받은 연사(演士)인 양 마이크를 들이대고 소감(所感)한마디를 부탁한다니, 간악(奸惡)한 무리들이 알권리라는 별 희한(稀罕)한 폐성(吠聲)으로 남의 인격을 짓밟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아니, 그것이 바로 저희들이 주장하는 알권리를 빙자(憑藉)한 반민주적 인권유린이 아니더냐?
이것이 누구한테서 부여받은 권리이며, 어디에서 근거한 법이더냐? 그러고도 세상이 뒤바뀌어 저희들을 그렇게 대접하면, 제일 먼저 민주주의와 인권을 내세우며 입에 거품을 무는 것이 천학(賤虐)의 무리들이니, 그 천학의 무리들이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쓰는 것이 이현령비현령이니라. 국가반역이 아니고는 통치행위는 법으로 잘잘못을 묻지 않는 것이 법이요 통례(通例)인데도, 찬역(簒逆)을 정당화하기 위해 구속하고, 성폭력은 강간죄(强姦罪)에 해당하는 엄연한 흉악범(凶惡犯)인데도 구속영장을 수차례 기각(棄却)하니, 이것이 또한 이현령비현령이 아니더냐?” 한다.
 
연작이 다시 묻되
“간도(奸徒)와 악도(惡徒)와 역도(逆徒)는 어떠한 무리들입니까?” 하니
홍곡이 이르되
“순리를 거슬러 찬역(簒逆)을 도모(圖謀)하고 획책(劃策)하고, 불의(不義)한 찬역에 부역(附逆)하고, 찬역의 주구(走狗)가 되어 날뛰는 무리들이 모두가 그러하니라. 악구요설(惡口妖說) 감언이설(甘言利說)과 호도(糊塗)와 기만(欺瞞)으로 눈을 멀게 하는 것이 그들의 덕목(德目)이니, 앞장서서 요령(鐃鈴, 搖鈴)을 흔들며, 맹인들을 불구덩이와 물구덩이로 몰아넣고 즐기는 것이 또한 그들이 자랑하는 오락(娛樂)이니라.” 한다.
 
연작이 또다시 묻되
“아무리 재미있는 놀이도 해가 지면 놀이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법인데, 어찌하여 모두가 날 저무는 줄을 알지 못하나이까?” 하니
홍곡이 웃으며 가로되
“네가 이제 시절을 알아가니 연륜(年輪)이라는 이름이 헛된 것이 아니구나! 더러는 꿈을 깰까 두려울 만큼 꿈자리가 재미있고, 더러는 재미있는 꿈을 찾아 이 꿈 저 꿈 다 꾸다가, 필경(畢竟)에는 ‘나는 이제는 꿈에서 깨어났다.’는 꿈을 꾸고 있으니, 일낙서산(日落西山)에 월출동산(月出東山)을 어찌 알겠느냐?” 한다.
 
재미있는 놀이를 하던 아이들도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법
하물며
회자정리(會者定離) 생자필멸(生者必滅)임에랴!
원효(元曉)노인이
나지 마라 죽는 것이 괴로움이요
죽지 마라 나는 것이 괴로움이다 하니
어린 동자가 장황설(張皇說)이라 비웃으며 이르되
생사가 모두 괴로움이라 하네.
 
<작성 - 2018년 7월 9일(음력 5월 26일)>

2018년 7월 2일 월요일

화두공안(話頭公案) - 제28관


<업구(業咎)>
 
연작이 묻되
“무엇이 업이고, 무엇이 허물입니까?” 하니
홍곡이 답하되
“신구의(身口意)로 짓는 바가 업이요, 업토(業土)에 함께하여 보고 들어야 함이 허물이니라. 강가에 배를 대는데 물고기가 깔려죽음은 사공의 업이나, 그것을 보고 듣고 아는 것은 나의 허물이니라.
삼독(三毒)에 이끌려 짓는 삼업(三業)은 악업(惡業)이니 악과(惡果)를 받음이요, 삼독을 되돌려 삼학(三學)으로 삼는 것은 정업(淨業)이라 하는 선업(善業)이니, 선과(善果)를 받는 이것이 곧 만고(萬古)의 큰 허물이니라.
지난날 어느 수좌가 악업은 참회(懺悔)할 길이 있으나, 선업은 참회할 길이 없다 하자, 삼소굴(三笑窟)의 한 노인이 악업은 참회함이 마땅하나, 선업은 참회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가, 큰 낭패(狼狽)를 당한 일이 있지 않았더냐?” 한다.
 
연작이 다시 묻되
“찬역(簒逆)을 획책(劃策)하여 도모(圖謀)하고, 찬역에 앞장서서 몸으로 행하고, 말과 글로서 호도(糊塗)하고 왜곡(歪曲)하며 행한 것은 당연히 업이라 하겠으나, 그러한 불의(不義)를 알고 보고 듣고도 외면(外面)함은 무엇입니까?” 하니
홍곡이 문득 노성(怒聲)으로 일갈(一喝)하되
“네가 끝까지 연작이라는 이름으로 아둔함을 자랑하려 하느냐? 전자(前者)는 불의한 찬역의 죄업이나, 후자(後者)는 하늘땅을 속인 불의지인(不義之人)들이요, 불용지죄(不容之罪)이니, 어찌 그것이 업인지 허물인지를 논하느냐!” 한다.
 
연작이 또다시 묻되
“어찌하면 업이 다하고 허물마저 씻을 수 있나이까?” 하니
홍곡이 그제야 노기(怒氣)를 거두고 이르되
“일체(一切)가 불류(不留)하니 무가기억(無可記憶)이요, 장강(長江)의 물을 한입에 다 마시면 생사가 둘 아니니, 방하(放下)하고 휴헐(休歇)하여 이룰 뜻마저 다하면, 마침내 일신면모(一新面貌)를 드러낼 수 있느니라.” 한다.
 
대붕(大鵬)이 날아오르니
용(龍)들과 봉황(鳳凰)은 가만히 엎드려 숨을 죽이고
만리무운(萬里無雲) 만리천(萬里天)이니
외로운 학(鶴) 큰 울음소리 아득히 하늘밖에 사무치네.
일제(一帝)가 칠왕(七王)을 부리며 천하를 다스린다 하니
칠지도(七支刀)를 하사(下賜)받은 제후(諸侯)들은
엎드려 감읍(感泣)하여 이마로 땅을 두드린다.
 
<작성 - 2018년 7월 2일(음력 5월 19일)>

2018년 6월 26일 화요일

화두공안(話頭公案) - 제27관


<방하휴헐(放下休歇)>
 
연작이 묻되
“어찌하여 가늠조차 하지 못하는 자리에서 능소(能所) 주객(主客)이 나누어지고, 능연소연(能緣所緣) 능취소취(能取所取)가 벌어지며, 능집소집(能執所執)의 분차별상(分差別相)이 일어납니까?” 하니
홍곡이 답하되
“물음이 고준(高峻)해야 답이 현묘(玄妙)하고, 장강(長江)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 하였으니, 이제 현묘함이 오히려 고준함을 감당(堪當)하지 못할까 두렵도다! 그러나 허물로써 허물을 살피니 허물만 더할 뿐이로다.
허물을 씻고 나면 아소(我所)와 의소(意所)와 심소(心所)와 공소(空所)가 모두 부질없으니, 허물 가운데서 허물을 알지 못하니, 어느 때에 허물을 바로 알아 허물을 씻고, 간월대(看月臺)에 올라 일취무공소(一吹無孔簫)로 은혜를 갚겠느냐!?
장부는 은원(恩怨)이 분명하고, 장부의 은원은 추상(秋霜)같아야 하는 법, 원수(怨讐)의 은혜마저 바로 알아 허물을 씻지 못한다면, 돌아가 쉴 곳이 어디이겠느냐?” 한다.
 
연작이 다시 묻되
“만파식적(萬波息笛) 옛 곡조(曲調)는 삼천대천(三千大天)에 사무치는데, 어찌하여 성외일음(聲外一音) 묘진색(妙眞色)은 보고 들을 길이 없습니까?” 하니
홍곡이 답하되
“눈앞에 있음이 분명하고 분명하여, 의지하여 내려놓고 쉬어버리지 못하니, 칠통(漆桶)속에서 무엇으로 명암(明暗)을 분별하며, 허물을 씻지 않고 어찌 일신면모(一新面貌)를 드러내겠는가? 성외일음 묘진색은 고사하고, 머리가 백발이 되면 자연히 가슴의 색깔도 다 없어져 일체를 품어갈 줄 알아야 하는데, 지금 사람들은 부끄러워할 일도 아닌 흰머리를 감추려고 머리에 색을 칠하고 다니니, 일평생 가슴에 그려온 색깔이 지워지지 않아, 무엇 하나도 품을 자리가 없지 않느냐?
부모의 목숨을 구해준 은혜는 억겁(億劫)이 흘러도 보답하지 못한다 하였는데, 부모의 목숨을 구해준 은공(恩公)의 자식을 해하고, 나라의 치도정로(治道正路)와 만년대계(萬年大計)를 망치고서도 부끄러움이 없으니, 자고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않는 것이 옳다는 옛말이 허언(虛言)이 아니지 않느냐?” 한다.
 
연작이 또다시 묻되
“‘여하시(如何是) 제불출신처(諸佛出身處, 일체제불이 몸 나툰 곳)오?’ 하고 물으니, ‘동산수상행(東山水上行, 동쪽 산이 물위로 간다.)’이라 하였다는데, 만약에 누가 와서 묻기를 ‘하이고(何以故)로 동산수상행(東山水上行)이오?’ 하고 물으면 무어라 일러야 하오니까?” 하니
홍곡이 이르되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뜰 앞에 잣나무.)가 판치생모(板齒生毛, 대문니에 털이난다.)이니라.” 한다.
 
어미 잃은 상주(喪主)는 외눈으로 눈물짓고
아비 잃은 상주는 무영사(無影裟)로 복(服)을 입으니
복상(複喪)을 당한 이는 어느 입으로 곡(哭)을 하고
스승을 여읜 이는 어느 몸으로 복을 입는가!!?
 
<작성 - 2018년 6월 25일(음력 5월 12일)>